허준 업적 알아보기~

Posted by BE you
2015. 11. 30. 21:30 역사이야기 History



오늘은 허준 업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소설과 드라마를 통해 허준을 알게 되었는데요 


신묘한 의술을 통해 박애를 실천하는 허준(극중 전광렬분)


은 신분을 극복하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신화적인 


인물로 묘사되곤 합니다.허준 업적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허준 (許濬 1539~1615)


허준은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났습니다.할아버지인 허곤은 무관 출신이며 경상우수사를


지냈으며 , 아버지 허론 역시 무관으로서 용천부사를 지냈습니다.어머니인 김씨가 첩이였으나


양반 가문의 서녀로 추정되며 천출은 아니걸로 알려져있습니다.권세 있는 가문의 서자로 태어나


큰 고생없이 자란 허준을 평하길 "어릴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총명하여 경전과 역사에 두루 밝았다"


라고 전해 집니다.




드라마와 현실에서의 허준 


허준이 의학을 선택한 이유와 어떠한 과정을 통해 공부를 하였는지에 대한 자료는 아쉽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드라마나 소설을 통해 알려진 유의태라는 스승도 허구의 인물이며 , 허준이 유의태의 시신을 해부한 뒤 큰 깨달음


을 얻는 내용또한 작가가 만들어낸 픽션이라고 하네요.내의원에 들어간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기 전까지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선조 때 유학자인 유희춘의 문집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문집에서의 허준의 모습은 유희춘이나 일가의 병 치료에 참여하거나 유희춘에게 책을 선물하기도 합니다.관직에


나아가기 전이나 살림이 궁색하지 않았고 의술이 어느정도 높은 평가를 받았슴을 짐작하게 합니다.1569년에는


유희춘의 종기를 완치하기도 하는데 그 일을 계기로 유희춘의 신임을 얻게됩니다.





이 후 유희춘이 이조판서에게 허준을 천거하는 편지를 보내게 되고 , 그 이후 몇 년 뒤 허준은 종4품 내의원 첨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31세~33세 사이의 일로 추정됩니다.당시 의과의 초시와 복시를 1등으로 합격하게 되면


종 8품의 관직을 얻게 되는게 관례이나 허준이 종 4품 내의원 첨정의 자리에 오른걸 보면 매우 파격적인 승진을 한것


임을 짐작케 합니다.의과의 통과없이 서자가 이러한 승진을 한 것을 보면 의원으로서 크게 인정을 받았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보이네요.





허준 업적 


중국과 일본에서도 명의로 칭송받고 있는 허준은 조선 중기의 의학자와 의관으로 활약하며 당시 임금인 선조를 보필하여


호성공신에 책정되는데요 임진왜란 이후 공신의 자리에 오르게 되지만 1607년에는 임금의 병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비판을 받게되지만 선조가 무마를 시키게 됩니다.하지만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종래의


예에 따라 조정 신하들의 갖가지 추궁으로 결국 파직을 당하고 유배까지 가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도 1597년부터 왕명에 의해편찬하고 있던 동의보감의 저술을 지속하였고 1610년 14년동안의 노력을 통해 완성시키게 됩니다. 


보통 허준 업적을 떠올리면동의보감만을 떠올릴텐데요 허준 집필 저서 중 하나이며 한의학에 대한 백과사전으로 현재는


 대한민국 보물 1085호로 지정되어 있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될만큼 커다란 가치를 지니고 있는 우리나라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의보가미 이외에도 언해두창집요,언해구급방,언해태산집요,찬도방론결맥결집성,신찬벽은방,벽역신방,내의선생안,남약중치방등


의 저서를 남기셨습니다.





허준에 대해 조금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들은 서울 강서구에 설립된 허준박물관을 방문하셔도 좋을 듯 하네요.





이상으로 오늘은 허준 업적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간디 업적 간디 명언 알아보기~

Posted by BE you
2015. 11. 3. 01:21 역사이야기 History


오늘은 간디 업적 및 간디 명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상해를 근본으로 한 종교사상과 ,인류애에 의한 폭력 부정을 통해


최후의 승리를 얻는다고 믿고 그대로 정치 활동에 실천하였던 간디.


그 당시 인습이였던 사회적 계급 제도 타파에 노력하고 불가촉천민


해방을 실천하였던 평화주의자였던 간디 업적 과 간디 명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간디


모힌다스 카람찬드 간디(1869.10.2~ 1948.1.30)는 인도에서 태어난 지도자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정신적,정치적으로 많은 걸 전파한 위대한 인물입니다.우리에게는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있으며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이며 인도 시인인 타고르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하네요.영국 유학을 마친후 인도가 영국에게 식민지 지배를 당하던 시기(1859~


1948)중 대부분의 기간을 영국으로부터 인도 독립 운동을 지도하게 됩니다.








간디 업적


평화주의자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텐데요 간디는 폭력을 부정하고 이에 그치지 않고 이를 그대로 정치 활동에 실천하였습니다.


육체적인 욕망을 극도로 제한하며 신념을 굳건히 하였고 ,때에 따라서 금식을 통해 속죄하기도 하였습니다.





사회적 계급 제도 타파 노력및 불가촉천민 해방을 실천하기도 합니다.기만을 증오하고 진실을 사랑하였으며 사회악에


대한 철저한 반항을 통해 정치활동을 펼쳐나갔습니다.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평생동안 폭력을 거부하였으며 그러한 


그의 비폭력주의는 인도뿐만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됩니다.인도 국민회의 지도자 역할을 맡은후


자유룰 향한 투쟁을 시작하면서 간디는 인도의 상징중 하나가 되게 됩니다.그 이후로 '마하트라'라는 이름도 얻게 되었다네요.


간디는 이러한 명예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세상은 그를 아직도 마하트마 간디로 부르고 있습니다.




간디 업적


종교적 너그러움


간디는 종교적으로도 너그러운 자세를 취하여 힌두교 이외에 종교인들과도 교류를 하였습니다.친구중에는 감리교 선교사인


스텐리 존스가 있었는데 존스가 간디에게 민중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묻자 간디는 '예수 그리수도 같은 삶'을 제안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반영불복종운동 (1942) , 인도국민회의파 연차대회 비폭력 저항(1919), 사티아그라하 투쟁 선언(1919),사티아그라하 행진(1913)


,인종 차별반대투쟁단체 지도자(1914)등의 업적이 있겠습니다.





간디 명언


*권리의 진정한 근원은 의무이다.


*기도하는 것은 , 늙은 여인의 게으른 넋두리가 아니다.적당히 이해되고 활용 된다면 가장 유력한 도구이다.


*나는 살기 위해 , 봉사하기 위해 , 또 가끔 즐기기 이해 먹은 적은 있어도 향략을 위해서는 먹지 않았다.


*나는 인도의 한 시민으로서 또한 양심을 존중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나라를 위해 정의를 행하고자 한다.


이 신념으로 인해 처벌된다면 서슴지 않고 중죄인이 될 명예를 얻고자 할 뿐이다.


*마치 내일 죽을 것처럼 살되 , 영원히 살아갈 것처럼 배우라.





일반적으로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폭력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이 보이게 되나 인도의 경우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사상에 입각하여 평화적으로 독립이 추진되었다는점이 매우 큰 특징입니다.그의 평화사상과 평화에 바친 업적은


실천면에서 볼 때 민주적 민족주의자로 보는 견해가 많다고 합니다.특히 비폭력과 무저항주의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오늘은 간디 업적 및 간디 명언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태조 이성계 가계도 알아보기~~!!

Posted by BE you
2015. 10. 22. 00:49 역사이야기 History



오늘은 태조 이성계 가계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3명의 아내로부터 13명의 자식을 얻었으며 


첫째부인 신의왕후 한씨로부터 장남 방우를 비롯하여 6형제와


두 딸,신덕왕후 강씨에게서 방번과 방석형제와 딸 하나를 얻었으며


다른 후궁으로 부터 두딸을 얻었이는데요 이성계 가계도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성계


조선의 제 1대 왕(재위 1392 ~ 1398) 우군도통사로 있을때 요동 정벌을 위하여 북진하던중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하게 됩니다.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전제개혁을 단행 ,신진


세력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한뒤 조선을 세우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뒤 국가의 기틀을 다지게


됩니다.




제1대 태조 이성계 가계도


조선 제 1대 왕 태조는 1392년 7월부터 1398년 9월까지 6년 2개월간의 재위기간을 지녔습니다.


태조의 고조부인 목조(안사)가 효공왕후와의 사이에서 증조부인 익조를 낳았으며 증조부인


익조는 정숙왕후 사이에 조부 도조를 낳게됩니다.조부는 경순왕후 사이에 아버지 환조를 낳게되는데


태조는 환조와 의혜왕후 사이에 태어나 조선을 건국하게 됩니다.





신의왕후 한씨로부터 방우(진안대군),조선의 제2대 왕인 정종(방과),방의(익안대군),방간(회안대군)


방원(정안대군,태종),방연(덕안대군),경신공주,경선공주 등 6남 2녀를 두었고 , 신덕왕후 강씨에게


방번(무안대군),방석(의안대군),경순공주 등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습니다.다른 후궁으로부터 의령옹주


숙신옹주등 2녀를 두었습니다.





 신의왕후 황씨


태조의 첫째부인인 신의왕후 한씨는 본관은 안변 , 증영문하부사 한경의 딸입니다.영흥으로 시집왔을 당시


이성계는 벼슬을 하지 못하던 때였다고 하네요.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하기 1년 전인 1391년 5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한씨 소생으로 방우,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태종),방연등의 6남과 경신,경선


등 2녀를 두었습니다.





신덕왕후 강씨


태조의 둘째 부인이며 계비였던 신덕왕후 강씨는 본관 곡성,판삼사사 강윤성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권문세가에서 태어났으며 태조의 집권 거사에도  참여하였을뿐아니라 조선 개국 이후에도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해하였으며 이로인해 이성계는 그녀의 소생이였던 방석을 세자로 삼기도 합니다.


태조 이성계 가계도를 보면 아들은 모두 8명으로 신의왕후 한씨 소생 6명 , 신덕왕후 강씨 소생 2명입니다.


이들 8명의 형제들은 조선 개국 이후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서로를 죽이는 살육전을 벌이는등 이성계를 


고통스럽게 만들게됩니다.한씨 소생의 형제들이 단합한뒤 강씨 소생 왕자들을 살해한 ' 제 1차 왕자의난'


조선 개국 역사를 피로 물들인 첫번째 사건이일어납니다.





진안대군 방우 (1354~1393)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난 방우는 찬성사 지윤의 딸과 결혼합니다.


예의판서를 역임하였으며 1388년에는 밀직부사로 밀직사강회백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된뒤 창왕의


친조를 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채 귀환하게 됩니다.조선 개국이후 1392년 8월에 진안군으로 책봉


되고 함경도 고원이 전답을 녹전으로 받게되나 지병으로 그 이듬해 40세 일기로 생을 마감합니다.





익안대군 방의(?~1404)


신의왕후 한씨 셋째아들로 태어난 방의는 조선 개국이후 익안군에 봉해졌으며 '제 1 차 왕자의 난'에 가담한뒤


방원을 보좌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사공신 1등이 되게 됩니다.


정종 즉위 이후 종친과 훈신들이 군사들을 나누어 관장하였을 당시 경기도와 충청도를 맡았으며 아우 방간이


'제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이를 개탄 , 관직을 사퇴하고 간접적으로 방원을 지원합니다.


1404년 병으로 죽게되며 형제들 가운데 가장 야심이 적고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있으며 왕위 계승권


과 관련되지 않고 중립을 지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회안대군 방간 (1364~1421)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넷째 아들.판서찬성사 민선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2명의 아내를 더 두었습니다.


조선개국후 회안군에 봉해지게되며 '제 1 차 왕자의 난'때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공으로 회안공이 됩니다.


1400년 박포와 함께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원과 대립하게 됩니다.방원에게 패배하여 생포된뒤


죽기전까지 유배지를 전전하게됩니다.왕권에 대한 야심이 매우 강하였고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로 전해집니다.

 

난을 일으켰음에도 태종과 세종이 배려로 천명을 누렸으며 1421년 58세를 일기로 충청남도 홍성(홍주)


에서 사망하게됩니다.





무안대군 방번 ( 1381~1398)


태조의 일곱째 아들로서 신덕왕후 강씨 소생입니다.어린 나이에 이성계의 지원으로 고공좌랑의 직위를


제수받았으며 조선 개국 이후 무안군에 책봉되어 희흥친군위절제사에 임명됩니다.한때 강비와 태조의


추천으로 세자로 내정되기도 하나 조준,정도전 등이 성격이 경솔하고 광망하다고 반대하여 방석에게


세자자리를 빼앗기게 됩니다.'제 1차 왕자의 난'때 방석과 함께 피살당하게 됩니다.당시 그의 나이


18세 였다고 하네요.





의안대군 방석(1382~1398)


태조의 8번째 아들로 방번의 연년생 아우입니다.11세의 나이에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어머니 강씨와 정도전,남은 등의 개국공신들의 지원에 힘입어 세자로서의 자질을 익히게 됩니다


그러나 강씨가 죽고 태조마저 병석에 눕게되자 그의 배후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고 이를 틈타


한씨 소생 왕자들이 난을 일으키고 이 난을 성공시킨 방원은 세력을 잡은뒤 방석을 유배시키고


이어 방번과함께 살해합니다.방석의 나이 17세였다고 하네요.





이상으로 태조 이성계 가계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순신 명언 어록 자세히 들여다보기~

Posted by BE you
2015. 10. 11. 21:42 역사이야기 History



오늘은 이순신 명언 과 어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존경하는 위인을 꼽으라면 항상 많은 분들이


꼽으시는 위인이 바로 충무공 위인일텐데요 저도 어릴적부터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통해서 많은 교훈을 얻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라에 충성하고 전장에 목숨을 바친 충신이였던 이순신 장군의 


이순신 명언과 이순신 어록을 통해서 다시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순신


우리나라 화폐에도 나올만큼 중요한 위인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조선시대의 장수로서


뛰어난 리더쉽과 통찰력을 갖춘 조선의 영웅입니다(1545~1598).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가들사이에서도 역사상 가장 뛰어난 해군 제독으로 꼽는다고 하는데요


임진왜란 때 왜군과의 전투에서 단 한차례의 패배없이 모두 승리하여 영국의 명장인 넬슨


제독과 버금가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합니다.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내면서 임진왜란에 의해 나라가 존망의 위기를 맞았을때 바다를 재패함으로써


전란의 역사에 있는 나라를 구해낸 명장이며 , 갖은 모함과 역경속에서도 일관적인 애국심과 고결한


인격은 온 국민이 존경하고 그 뜻을 후세에서도 크게 기리고 있습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이는 이순신이며,가장 미워하는 이도 이순신이고 , 가장 좋아하는 이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이도 이순신이다.가장 죽이고 싶은 이도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다."





이순신 명언은 아니지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게 참패를 당한 왜군 장수였던 와키사카 야스하루가 후손에게 남긴


말이라고 합니다.적군조차도 흠모에 마지않았던 모습을 보면 이순신 장군의 위상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는데요 그 당시 이순신 장군은 전란 내내 놀라운 전략과 무용으로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고 종국에는


죽음까지도 감춘채 퇴각하는 왜군을 섬멸함으로써 남해의 수호신으로 거듭났다고 합니다.





전란 내내 당리당략에 빠져있던 위정자들로부터 충심을 외면받았으나 좌절하지 않고 흩어진 군기를 바로 잡고


왜군과 맞선 충신이였습니다.그리고 삶의 터전을 잃고 방황하던 백성들을 두루 살피던 의인이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어린 왜군 포로에까지 온정을 베풀던 인도주의자였다고 하네요.





이순신 명언 


必生卽死 死必卽生


필생즉사 사필즉생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 단 12척의 배로 133척의 배와 싸우는 절대적으로 열세의 상황에서의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 군의 사기를 높이고 승리를 다짐하기 위해 남기신 명언입니다.





勿令妄動 靜重如山


물령망동 정중여산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거이 행동하라."


옥포에서의 전투를 앞두고 처음 전투를 하게된 군사들에게 전투상황에서의 당황하지 않고 냉철함과 여유를 가지라는


뜻에서 이순신 장군이 남기신 명언입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이순신 장군이 정탁의 상소문으로 다시 복직하여 군사를 정비한 결과 12척의 배와 군사 120명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당시 임금은 수군을 없애려고 마음먹었으나 이순신 장군의 강력한 건의로 수군을 유지하였다고 합니다.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


삼척서천 산하동색 일휘소탕 혈염산하


"석자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





이순신 명언 , 이순신 어록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랐다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해서 불평치 말라


- 나는 14년 동안 변방의 말단 수비장교로 근무하였다.


몸이 약하다고 고민 하지 말라


- 나는 평생 전염병과 고질적인 위장병으로 고통 받았다.


머리가 나쁘다 말하지 말라


- 나는 첫 시험에 낙방한뒤 서른 둘 늦은 나이에 겨우 과거에 급제하였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 나는 적군 침입후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에야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 나는 불의한 직속 상관들과의 불화로 인해 몇 차례나 불이익과 파면을 당해야 했다.


자본이 없다하여 절망하지 말라.


-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 열 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의 배를 막아냈다.


죽음이 두렵다 말하지 말라.


-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로로 죽음을 택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은 동서고금 통틀어 가장 최고의 장군이라 칭송 받고 있는데요


명언과 이순신 어록을 살펴보면 정말 존경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느낌을 듭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모습에 많은 감동과 교훈을 느끼게


되네요.






정도전 업적 자세히 살펴보기

Posted by BE you
2015. 9. 28. 14:32 역사이야기 History



오늘은 정도전 업적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드라마로도 방영되어서 큰 인기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


던 정도전(鄭道傳 1337-1398) 조선 건국 일등 공신이며 조선의


설계자로 알려져 있습니다.조선을 세운 개국공신이였던 


정도전 업적을 구체적으로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도전은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사이에 문신 이자 무신,유학자이자 시인이였으며 


외교관,정치가,유교 사상가,유학 교육자였습니다.




정도전 업적


조선 초기 성리학자중 한명이였으며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 시호는 문헌(文憲)이였습니다.


아버지는 형부상서 염의선생정운경이며 어머니는 우연의 딸 영천 우씨였습니다.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등에 머물머 성리학을 장려하였으며 , 외교적으로 권문세족과 대항하며 명나라


와의 외교론을 주장하다가 수차례의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게 됩니다.



공민왕


그 이후 1383년 이성계를 만나게 되어 정사를 논하고 역성혁명론자가 됩니다.이후 이성계,정몽주와


함께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하고 1392년에 조선 건국을 주도하여 개국공신 1등관에


녹훈되게 됩니다.




판삼사사를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영의정부사에 추증되게되며 봉화백(奉化伯)에 봉작되게 됩니다.


조선 건국 일등 공신이자 최고의 권력자였던 정도전은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였으며 모든 쳬제


정비를 통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는 한편 한양 시내 전각과 거리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도 전해집니다.



정몽주



제 1차 요동정벌(1388),제 2차 요동정벌(1392)에 반대하였으나 요동 정벌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의 외교 마찰을 빚기도 하였으며 왕자와 공신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고 하다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 후로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방석등을 세자로 추대하였으며 요동 정벌을


계획한 이유로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갈등을 일으키던 중 , 이방원의 정변으로 인해 1398년 8월 1차


왕자의 난때 이방원의 군사들로부터 피살을 당하게 됩니다.





성리학 이념을 보급하였으며,안향->백이정


->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하였던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였습니다.정몽주,권근과 동문으로 후에 정몽주와


길재 문하생들에게 폄하되기도 하였습니다.



태조 이성계


성리학을 정착시켜 조선사회를 국교화시키는데 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신덕왕후 강씨와 더불어 세자


책봉에 공을 들였으나 제 1차 왕자의 난 이후 조정에서 철저히 배격되게됩니다.태종은 그를 역적으로 


몰고 정몽주를 추상하게되며 이후 그는 포은 정몽주와는 다르게 역적으로 몰려 지내다가 고종 때 복권


되게 됩니다.





정도전 업적 정리


조선 건국 일등공신이며 전략,외교 ,법제,행정에 밝았습니다.시와 문장에 도 뛰어나'고려사'37권을 편찬


하기도 하였으며 '납씨가''신도가'등의 악장도 지었다고 합니다.또한 '조선경국전''경제문감'삼봉집'


등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삼봉집은 정도전의 글을 모아서 만들어진 책이며 지금 전해지는 것은 조선


정조때 지어졌으며 보물 제 1702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상으로 정도전 업적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인조 삼전도 굴욕 역사 돌이켜보기

Posted by BE you
2015. 9. 27. 17:29 역사이야기 History


인조 삼전도 굴욕


삼전도는 조선 시대에 한강 상류에 존재하던 서울과 경기도를 


잇는 나루터였다고 합니다.오늘날 서울 송파구 삼전동 부근에 위치


하였으며 왕이 이웃 헌릉과 선정릉으고 갈 때 이 나루를 이용하였다고


전해지네요 오늘은 인조 삼전도 굴욕 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런 사건


한강 상류 삼전도에서 1637년 1월 30일에 우리나라 역사에서 잊지 못할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우리가 오랑캐라고 멸시해오던 청나라 황제에게 조선 왕 인조가


절을 세 번 하고 머리를 아홉번 조아린 사건입니다.




1637년 1월 30일 묘시 (오전 다섯시 ~ 일곱시)무렵에 인조는 대신들과 호위군을 동반하여 서문을 


빠져나온 뒤 청 태종 지휘본부가 위치해있던 삼전도로 향하게 됩니다.국왕의 의례복도 아닌 남색


융복(戎服) 차림의 초라한 행색이였다고 합니다.이를 지켜봐야했던 수많은 백성과 군사들이 통곡을


하였다고 합니다.





인조가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受降壇) 말그대로 항복을 바치는 단에 나아가게 되고 청태종에게


눈물을 흘리며 세 차례의 큰 절과 아홉 차례 머리를 땅에 박았다는 항례(항복의식)인 '삼배구고두'를


행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될 만큼 치욕적인 사건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 당시 인조는 땅에 엎드린 채 대국에 항거한 죄를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하였고 이에 청 태종은


신하들에게 조선 국왕을 용서한다는 칙서를 내리게 하였다고 합니다.



인조 삼전도 굴욕


조선 15대 왕 광해군 재위 때 여진족 추장인 누루하치가 부족통일을 하고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누루하치 (후금의 태조)는 중원을 통일할 목적으로 명나라를 공격하였으며 명나라는 과거 조선을 위해 파병을


한것을 이유로 지원을 요청합니다.하지만 현명했던 광해군은 명나라의 패를 예상하고 명나라에 파명을 하는


것과 동시에 후금과 싸울 뜻이 없슴을 전해 피 한 방울 흘리지않고 현명하게 외교를 펼칩니다.


하지만 이로인해 광해군은 명나라를 배신하였다는 이유로 신하들에게 쫓겨나게 됩니다.





이 후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명나라와는 친하고 금나라를 배척한다는 '친명배금'정책을 쓰게 되는데 할아버지인


선조가 일본으로부터 유린을 당한지 40년 만의 일이라고 합니다.


인조는 임진란으로 부터 역사의 교훈을 얻지 못한채 오랑케 후금과의 전쟁인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치루게 되는데


가장 치욕적인 참패를 당하게 됩니다.병자호란 때 오랑케인 청나라 황타이지가 삼전도에서 인조에게 항복을 받아내게


된 것입니다.인조 삼전도 굴욕의 역사가 이렇게 해서 삼전도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을 인질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고 청나라의 요구로 비문이 건립되게


됩니다.비문 건립 관련한 최초의 기록들도 1637년 3월부터 등장합니다.


같은해 3월 12일 비변사에 삼전도 비석이 준비되어 있으니 비문을 얻어다가 새기면 된다는 보고가 발견되었고 


3월 20일 인조의 재가가 떨어져 수항단 터에 세우기로 합니다.





지세가 낮고 한강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장마철에 물이 들 것을 대비 지면에서 5-6장 높이의 돌계단을 쌓아 올렸으며


공조가 주관하고 호조와 병조의 후원으로 인부들에게 용가를 지불하고 공사를 착수합니다.


그 해 10월 30일경 공사가 끝마치게 되어 11월1일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을 모두 해산조치하고 정문과 협문 3칸 정도 규모


비각이 완성되어 비문 내용만을 각자하는 일만을 남겨놓게 되었습니다.서울에 체류하던 청나라 사신 마대부등이 삼전도 비가


들어 설 자리를 방문하였고 귀부 및 기단등 규모를 일일히 확인하고 돌아갔다고 전해집니다.





비문을 찬술하는 일만 남겨둔 상황에서 조선은 청에서 문장을 받아 비문을 새기게 되는걸로 예상하였으나 문장을 지으라는


인조의 전교로 인해 비변사에서 비밀리에 적격자를 탐문하게 됩니다.인조는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고 후일을 도모하는


것은 나의 역할이 될테니 오늘은 다만 문자로 저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어 일을 더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 뿐임을


강조하며 간곡히 비문의 찬술을 부탁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이경석은 자신의 명예보다 국가의 안위를 먼저라고 판단하고


고민끝에 비문을 짖게 됩니다.후날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준 형에게 '글을 배운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매우 고통스러워하였으며 제자들에게도 수모와 공격을 받게 됩니다.





청일전쟁 이후 고종 32년에 치욕적인 역사를 잊고자 이 비문을 강물 속에 쓰러뜨렸으나 일제 강점기때 일제가 우리 민족의


항복하였던 역사를 알리게 하기 위해 다시 비문을 세우게 하였다고 합니다.그 이 후 우리 민족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하고나서 이 지역 주민들이 땅속에 파 묻었으나 1963년 홍수로 다시 모습이 드러나게 되자 비를 다시 세워두었다고하네요.


정말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진 삼전도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해서 인조 삼전도 굴욕 에 대한 역사를 알아보았습니다.




신라 왕 계보 신라 왕조 계보 알아보아요~~~

Posted by BE you
2015. 9. 23. 23:58 역사이야기 History


오늘은 신라 왕 계보 신라 왕조 계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신라의 초기 이름은 사로국이였는데요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전에 이사금 혹은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22대 지증왕때에 이르러 왕이라는 칭호를 쓰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신라 왕 계보 신라 왕조 계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라


신라는 골품을 지키고자 근친결혼이 성행하였다고 합니다.상식적으로는 매우 이해하기


힘든 문화라고 생각되는데요 남녀관계또한 매우 문란하였다고 전해지며 왕들의 계보를


살펴보게되면 누구의 자식인지 모를정도라고 하네요.





신라 왕 계보 신라 왕조 계보


1대는 박혁거세 입니다 (BC57-AD4) : 신라의 시조이며 왕호는 거서간이였습니다.


국호를 서라벌이라고 명하고 수도를 금성으로 정하였으며 국가의 기초를 세우게 됩니다.


신라의 56명의 왕중 61년 재위를 하였습니다.가장 오랫동안 재위하면서 농사와 양장을


장려하였다고 전해집니다.





2대는 남해왕 입니다.(4-24) : 박혁거세의 맏아들이며 석탈해(탈해 이사금)을 사위로 맡아


대보로 삼은뒤 정사를 맡겼다고 합니다.남해 거서간,남해 차차옹


3대는 유리왕입니다 (24-57) : 남해 차차웅의 아들이며 신라 가악의 기원인 도솔가를 지었습니다.


노례 이사금이라고도 불립니다.





4대는 탈해왕 입니다(57-80) : 국호를 계림으로 하였으며 일본과 화친하고 가야,백제와 잦은


다툼을 벌였습니다.


5대는 파사왕입니다.(80-112) : 유리왕의 아들이며 성은 박입니다.월성을 쌓아 백성을 옮겨살게


하고 음집벌국을 정벌,여러나라를 병합하는등 국위를 떨쳤다고 전해집니다.파사 이사금


6대는 지마왕입니다.(112-134) : 파사왕의 아들이며 성은 박 ,'지마'로도 불리였습니다.


왜국과 수교를 맺었으며 백제와 협조하여 말갈의 공격을 물리쳤습니다.지마 이사금


7대는 일성왕입니다.(134-154): 유리왕의 아들이며 농본국 정책을 펼쳐 농지를 개간하고 제방을


고쳐 쌓았으며 백성들의 검소한 생활장려와 사치를 금하였다고 전해집니다.





8대는 아달라왕입니다.(154-184) : 성은 박이며 현의 설치와 도로의 개통등 내치에 힘썼습니다.


9대는 벌휴왕입니다.(184-196): 성은 석이며 탈휴왕의 손자라고 합니다.좌군주와 우군주로 군직을


만든뒤 소문국을 정벌하였다고 합니다.벌휘 이사금,벌휴 이사금으로 칭하기도 합니다.


10대는 나해(내해)왕입니다.(195-230) : 성은 석이며 벌휴왕의 손자입니다.포상 팔국 침입을 받은


가락국의 요청에 구원병을 파견하여 물리쳤다고 합니다.209년





신라 왕 계보 신라 왕조 계보


11대는 조분왕입니다.(230-247):벌휴왕의 손자이며 성은 석입니다.감문국을 정벌한뒤 군으로 만들고


왜병 침입을 물리쳤습니다.골벌국의 항복을 받기도 하였다네요.


12대는 첨해왕입니다.(247-261):벌휴 이사금의 손자이며 조분 이사금의 동생입니다.사량벌굴을 공격하여


통합하고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다고 합니다.달벌성을 지어 백제를 견제하였다고 합니다.첨해 이사금


13대는 미추왕입니다.(262-284) : 김알지의 7대손 이며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미추)김씨 왕가의


시조로 전해집니다.조분이사금의 사위자격으로 왕위에 오릅니다.농사를 장려하였으며 수차례의 백제 침입을


물리쳤습니다.미추 이사금





14대는 유례왕입니다.(284-298) : 조분 이사금의 맏아들이며 성은 석입니다.백제와의 수교 (286년) , 삼한 소국


중 하나인 이서국 침입을 격퇴하였습니다 (297년).유례 이사금


15대는 기림왕입니다.(298-310): 이찬걸숙의 아들이며 조분왕의 손자였습니다.사신 교환과 빈민구제를 하는등


선정을 베풀었다고 전해지네요.기림 이사금,기립왕


16대는 홀해왕입니다.9310-356):나해왕의 손자이며 성은 석입니다.기림왕 대를 이을 자식이 없게되자 대신들의


추대로 즉위하게 됩니다.흘해 이사금


17대는 내물왕 입니다.(356-402) : 미추왕의 조카이며 김알지 8세손이라고 합니다.의성김씨 직계조상 중에 최초의 


왕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왕권을 강화하고 고대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고 전해집니다.한자가 처음 사용된걸로도


추정됩니다.내물 이사금





18대는 실성왕입니다.(402-417) : 대추의 동생인 대서지와 이리부인 석씨의 소생이였습니다.내물왕 서거후 즉위하였으며


일본,고구려와 수호를 맺었다고 합니다.실금왕


19대는 눌지왕입니다.내물 마립간의 아들이며 성은 김입니다.고구려에 볼모로 다녀온뒤 실성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릅니다.


고구려 묵호자로 부터 불교가 전파되었습니다.백제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견제하였으며 왕위 부자 상속제를 확립하였다고


합니다.눌지 마립간


20대는 자비왕입니다.(458-479) : 왜인의 월성침입을 격퇴하고 고구려의 백제침공에 나제동맹을 통해 백제를 도왔다고 합니다.


자비 마립간


21대는 소지왕입니다.(479-500) : 성은 김이며 경주에 시장을 설치하고 각 지방에 우역을 두었다고 합니다.백제와 혼인 동맹을


맺었으며 고구려와 수차례 전쟁을 치뤘다고 전해집니다.비처 마립간,소지 마립간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22대는 지증왕입니다.(500-514):이름은 지도로,지대로,지철로 였으며 성은 김이였습니다.국호를 신라로 정하였으며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울릉도를 점령하여 국토를 개척하고 중국식으로 왕에게 시법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경법을 시행하여 농사를 장려하고 순장법을 금하였다고 하네요.지증 마립간





23대는 법흥왕입니다.(514-540) : 이름은 원종이며 성은 김이였습니다.불고가 들어와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금관가야를


멸망시킵니다.이차돈이 순교한 시기입니다.율령을 처음 반포 백과의 공복을 지정하는등 국가 체제 확립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입니다.


24대는 진흥왕입니다.(540-576) : 삼맥종,심맥부 성은 김입니다.한강 하류지역을 차지하여 삼국 통일 기반을 마련하였고 영토 확장및


변경에 순수비를 세웠다고 합니다.화랑 제도 창시,국사 편찬,가야금 제작,연주등 문화창달에도 힘을썼다고 전해집니다.





25대는 진지왕입니다.(576-579) : 이름은 사륜,금륜 성은 김이였습니다.백제의 잦은 침공을 방비하고자 내리서성을 구축하였으며


상대등 거칠부에게 국사를 맡겼다고 합니다.중국 진나라에 조공하여 화친을 맺었다고 합니다.실정으로 인해 폐위되었다고 하네요.


26대는 진평왕입니다.(579-632) : 이름은 백정이며 성은 김씨였습니다.수나라와 친교를 맺었으며 불교 진흥을 꾀하였습니다.


진지왕 폐위이후 진지왕의 형 동륜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수나라의 도움으로 고구려를 견제하였으며 당나라가


생긴 후에도 친교를 맺고 고구려를 견제하였다고 합니다.





27대는 선덕여왕입니다.(632-647):이름은 덕만 성은 김입니다.진평왕이 아들없이 죽게되자 여성 최초의 신라 왕이 됩니다.김춘추를


서신으로 보내 당나라의 원군을 청해 백제를 침공하였으며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 문화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28대는 진덕여왕입니다.(647-654) : 이름은 승만이며 성은 김입니다.김유신을 기용하여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았다고 합니다.


29대는 태종 무열왕입니다.(654-661) : 이름은 춘추이며 성은 김 묘호는 태종이였습니다.진지왕의 첫 번째 손자이며 진골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신라의 왕이 되었습니다.율령 정비,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고 전해집니다.





30대는 문무왕입니다.(661-681) :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김유신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며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습니다.(676)


31대는 신문왕입니다.(681-691) : 이름은 명지,정명이며 성은 김씨였습니다.문무왕이 맏아들로 국학을 세워 학문을 장려하였으며


관제정비를 통하여 신라 황금시대를 이루었다고 전해집니다.


32대는 효소왕입니다.(692-702) : 이름은 이공,이홍이며 성은 김씨입니다.설총에게 이두를 정리하게 하였으며 관제 정비 및


당나라,일본과의 외교를 맺었으며 처음으로 의학 박사를 두었다고 합니다.





33대는 성덕왕입니다.(702-737) : 이름은 흥광이며 성은 김입니다.효소왕의 동생이며 본명은 융기입니다.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힘썼으며 혜초가 서역에서 돌아온뒤 저술한 '왕오천축국전'을 지은 시기입니다.


34대는 효성왕입니다.(737-742) : 이름은 승경이며 성은 김입니다.성덕왕의 둘째 아들이며 파진찬 영종의 모반 평정,당나라 교섭


을 통해 원만한 관계를 이루었다고합니다.


35대는 경덕왕입니다.(742-765) : 이름은 헌영이며 성은 김입니다.효성왕의 동생이며 당나라의 문물을 흡수하여 제도,관직을 


당나라 식으로 고쳤으며 국내 지명또한 한자식으로 고쳤다고 합니다.국학 진흥및 불교 증흥에 힘썼으며 통일 신라 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룬 시기라고 합니다.





36대는 혜공왕입니다.(765-780) : 이름은 건운이며 김씨입니다.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였고 재위기간에 천재지변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하였슴에도 사치와 방탕을 일삼으며 국사를 등한시하다가 이찬 김지정의 난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37대는 선덕왕입니다.(780-785) : 이름은 양상이며 성은 김씨.내물왕의 10세손입니다.


이찬 김지정의 난을 진압한뒤 혜공왕을 살해하고 왕이 됩니다.


38대는 원성왕입니다.(785-798) : 이름은 경신이며 성은 김씨 입니다.내물왕 12세손이며 상대등에 오른뒤 선덕왕이 후사 없이


서거하자 김경신을 몰아내고 왕으로 추대되었다고 합니다.


39대는 소성왕입니다.(798-800) : 이른음 준옹이며 성은 김씨입니다.재위 2년만에 죽습니다.그의 죽음으로 인해 신라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40대는 애장왕 입니다.(788-809) : 이름은 중희 성은 김씨입니다.태종 무열왕,문무왕의 묘당을 세웠으며 해인사를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41대는 헌덕왕입니다.(809-826) : 이름은 언승이며 성은 김이였습니다.조카였던 애장왕을 살해한후 즉위하였으며 친당 정책을 폈습니다.


42대는 흥덕왕입니다.(826-836) : 이름은 수종이며 성은 김씨입니다.원성왕의 손자.헌덕왕의 동생이였습니다.청해진을 만들었으며 장보고를


대사로 삼고 해적의 침입을 막게 합니다.복색 제도를 개정하였으며 백성의 사치를 금하였다고 전해집니다.


43대는 회강암입니다.(836-838) : 이름은 제륭이며 성은 김입니다.


44대는 민애왕입니다.(838-839) : 이름은 명이고 성은 김입니다.시중으로 있을시 흥덕왕이 승하하게 되자 김제륭을 희강왕으로 내세운뒤


스스로를 상대등이 되어 정권을 잡은뒤 3년후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하지만 그 다음해에 신무왕에게 살해를


당하게 됩니다.





45대는 신무왕입니다.이름은 우징이며 성은 김입니다.민애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나 수개월 후 병사하게 됩니다.


46대는 문성왕입니다.(839-857) 이름은 경응 성은 김입니다.신무왕의 태자이며 장보고의 반란으로인하여 피살됩니다.


47대는 헌안왕입니다.(857-861) : 이름은 의정,우정이며 성은 김입니다.제방을 쌓고 농사를 장려하였으며 후사가 없이 서거하여


왕족 응렴을 사위삼고 왕위를 물려줍니다.


48대는 경문왕입니다.(861-875) : 이름은 응렴,의렴이며 성은 김씨입니다.신라 쇠퇴기에 즉위하였으며 중앙 귀족 모반 및 지방 


반란 진압에 힘썼으며 황룡사 탑을 지었습니다.


49대는 헌강왕입니다.(875-886) : 이름은 정이며 성은 김씨입니다.재위기간중 처용무가 유행하는등 사치와 환락으로 인해


쇠퇴기를 맞게 되는 시기였다고 합니다.


50대는 정강왕입니다.(886-887) : 경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이름은 황 성은 김씨였습니다.진성여왕의 오빠이며 이찬 김요 반란을


평정하였습니다.





51대는 진성여왕입니다.(887-897) : 오빠였던 정강왕이 재위 2년 만에 죽게되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재위기간중 나라가 혼란에


빠져 후삼국으로 다시 나뉘게 됩니다.


52대는 효공왕입니다.(897-912)입니다.: 이름은 요이며 성은 김입니다.궁예와 견훤으로부터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후삼국 정립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53대는 신덕왕입니다.(912-917) 이름은 경휘이며 성은 박씨였습니다.아달라의 원손이며 본명은 수종이였습니다.


54대는 경명왕입니다.(917-924) : 이름은 승영이며 성은 박입니다.국운 회복에 힘썼으나 실패합니다.


55대는 경애왕입니다.(924-927) 이름은 위응이며 성은 박입니다.신라의 국세 쇠퇴때 즉위하였으며 견훤과 궁예의 압박을 받게됩니다.


포석정에서 견훤의 습격을 받고 자살합니다.





56대는 경순왕입니다.(927-935) : 이름은 부이며 성은 김씨입니다.신라의 마지막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왕건에 항복하고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와 결혼합니다.경주 사심관에서 여생을 보내다 죽습니다.


이상으로 신라 왕 계보 신라 왕조 계보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백제 건국신화 알아보기

Posted by BE you
2015. 9. 22. 01:06 역사이야기 History


오늘은 백제 건국신화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에서부터 시작되는데요 그의 아버지는 드라마에서도


나왔었던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였습니다.주몽이 북부여로부터 졸본부여로


넘어왔을때 부여왕에게는 딸이 세명 있었는데 주몽의 비범함을 느낀 부여왕은


둘째딸을 주어 사위를 삼게 됩니다.그렇게 해서 백제 건국신화의 맨 처음 조상이


되는 온조가 태어나게 됩니다.온조의 형은 비류이며 비류와 온조는 주몽이 전에


낳은 아들인 첫째아들 유리가 찾아오자 태자에게 용납이 되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다른 지역으로 자신들을 따르는 신하들을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건국신화로 본 백제 


온조 시조설


비류와 온조가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오른 뒤 근거지가 될 만한 땅을 찾게 됩니다.


비류가 바닷가 근처에 근거지를 잡으려고 정하자 열 명의 부하는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를 끼고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멧부리에 의지하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이 펼쳐져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있어 천연으로 이루어진 요새의 이로움으로 보아 얻기가 어려운


지세인데 이곳에 도읍을 일이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며 간청했으나 의견을 듣지않은채


지금의 인천 부근인 미추홀로 떠나게 되고 온조는 이 후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게 됩니다.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십제라 명하였으며 기원전 18년 이었습니다


.이 후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매우 습하고 물이 짜서 생활하기 힘들게 되자 그를 따르던 백성들을 


 모아 다시 위례로 돌아오게 됩니다.위례성에 돌아와서 보니 자리잡힌 도읍과 백성들의 안정된





삶을 확인하게 되고 이 후 비류는 후회와 부끄러움으로 인해 죽고 맙니다.결국 비류의 신화와 백성이


합류하게 되고 온조를 따르게 되었습니다.이 후 주변 소국들을 정복하여 백성을 늘리고 나라의 


세력이 커지게 되자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국왕의 핏줄이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온 까닭으로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고 하네요.


후에 성왕 연대에 와서 도읍을 사자에 옮기게 된 것이 지금의 부여군이라고 합니다.





백제 건국신화


비류 시조설


시조는 비류왕이며  그의 아버지는 북부여 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입니다.어머니인 소서노는 졸본인인


연타발의 딸이며 우태와 결혼한후 아들 둘을 얻게 되는데 맏이가 비류 둘째가 온조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우태가 죽은뒤 혼자 졸본에서 살았으며 주몽이 부여에 용납되지 못하고 기원전 37년 경 봄 


남쪽으로 탈출한뒤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운뒤 국호를 고구려로 지었으며 소서노를 왕비로 맞이합니다.





왕조를 창건하는데 있어 소서노의 내조가 있었기에 주몽은 그녀를 매우 총애하였고 비류를 대함에 있어


친하들처럼 대하였다고 합니다.이 후 주몽이 부여에 있을 당시 예씨로 부터 얻은 아들인 유류가 찾아오자


그를 태자로 세우고 왕위로 책봉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비류는 아우 온조에게 처음에 대왕께서 부여의 환란


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하였을때 어머니가 재물을 쏟아부어 나라 창업을 도와 이루었으니 어머니의 업적이


많았던 것이다.허나 대왕께서 세상을 뜨시게 되자 국가가 유류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우리들이 여기에


머무르며 혹처럼 답답하고 암울하게 지내느니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 땅을 점치고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나을 것이다 라고 합니다.그리하여 마침내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미추홀에 와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상으로 백제 건국신화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숙종 가계도 자세히 알아보기 장희빈과의 관계

Posted by BE you
2015. 9. 17. 18:54 역사이야기 History


숙종 가계도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왕중에 한 분을 꼽으라고 하면 


자기의 여자들까지 권력투쟁에 이용하고 많은 비빈을


거느렸던 숙종을 꼽을 수 있겠는데요 드라마 소재로 


자주 회자가 되고 있는 숙종과 장희빈 오늘은 숙종 가계도를


통해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숙종


조선시대 제 19대 왕으로써 1661년 출생하였으며 재위기간은 1674~1720년 입니다.


다소 우유부단하였던 아버지였던 현종보다 머리가 총명하고 과격한 면이 어머니인


명성왕후의 성격을 닮은걸로 추측이 됩니다.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는 숙종이


아플때 무당을 부른뒤 추운 겨울에 물벌을 서라고 하는 민간요법을 행하다 독감에


걸려 생을 마감하였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습니다.그만큼 자식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네요.





숙원 장씨를 매우 총애하여 1688 초의로 승격을 시켜주었으며 그 이듬해 장씨에게서


출생한 왕자의 명호를 정하려 하였으나 서인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자 김수항,송시열


등을 유배시킨뒤 왕자의 명호를 정하였다고 합니다.






숙종은 정궁 3명을 비롯하여 후궁을 6명이나 거느렸다고 전해지는데요 


숙종의 화려하면서 아름다운 후궁들의 이야기는 후세에서도 자주 드라마의 소재로


사용 될 만큼 인기가 높은 것 같습니다.





인경황후와 처음 혼인을 하고 공주를 얻기도 하였으나 인경왕후가 천연두로 인해 


일찍 사망하게 됩니다.이후에 계비인 인현왕후를 들이게 됩니다.





인현황후는 서인세력의 우두머리격이였던 민유중의 여식으로서 조선시대 엘리트


코스를 밟은 여인이였으며 훗날 숙종의 모후였던 명성황후가 사망하고 3년상을 


치룬뒤 다시 불러들이기도 하였습니다.이유는 숙종 및 숙종의 조모인 장렬왕후의


간절한 요청때문이였다고 합니다.이 후 왕비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후 장씨를


희빈으로 승격시키고난뒤 1690년도에 왕비로 책봉시키게 됩니다.





그 이후 숙종은 인현왕후의 폐위를 후회하게 되며 결국 폐비복원운동을 벌이던


서인들을 대거 등용시킨뒤 폐비를 복위하게 됩니다.


그 이후 희빈으로 강등된 장희빈을 1701년에 무고죄로 사사하게 됩니다.


이후 숙종은 후궁이 중전이 될 수 없다고 하교한뒤 이미 중전에 오른 최 숙빈은


사망에 이를때까지 사가에서 지낼 수 밖에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숙종 가계도





업적


대외적으로 평온한 안정기를 지냈기 때문에 선조 말부터 지속된 대동법을 평안도,함경도를


뺀 전국에 실시하였으며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이후부터 지속된 토지사업을 마무리 짓게됩니다.




이상으로 숙종 가계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선조 가계도 자세히 알아보기

Posted by BE you
2015. 9. 16. 12:45 역사이야기 History



선조 가계도


조선의 14대 왕 선조.역사에 기록되어진 선조의 모습은 친아들에


대한 시기와 질투,능력이 뛰어난 충신들을 의심하거나 시기하는등


유별난 성격을 보여주는데요 그럼에도 다행인건 그 당시에 유능한


인재들이 조선에 많이 있었다는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은 선조 가계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조


선조는 조선 최초의 방계 임금이라고 합니다.조선 13대 명종의 후사 없이 서거한뒤


하성군이던 선종이 왕이 될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중전의 후사인 대군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왕이 된 것입니다.





영화나 사극의 주연으로 자주 등장하는 광해군도 선조의


아들입니다.장자는 아니였으나 형인 임해군이 패역하게 되면서 임진왜란 당시에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습니다.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게되자


정통성으로 문제가 생기기도 하였습니다.그러나 그 당시 영창대군의 나이가 정세를


돌보기에는 너무 어렸고 선조가 승하하였기 때문에 광해군이 계속해서 보위를 이어나가


게 됩니다.하지만 지속되는 정통성 논란으로 인해 광해군은 영창대군과 임해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명분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선조 가계도


선조는 총 8명의 부인에게서 14남 11녀의 자녀를 얻었으며 , 정비 의인왕후는 몸이 약해


아이를 얻지 못하였다고 전해지며 , 계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포함 1남1녀 , 공빈 김씨가


광해군과 임해군등 2남,정빈 홍씨가 1남1녀,온빈 한씨가 3남 1녀를 낳았다고 합니다.





*의인왕후 박씨(1555~1632)


번성부원군 박응순의 딸로 1555년에 태어나 1569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를 행하였으나 


몸이 허약하여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합니다.1600년 향년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능은 목릉이며 선조와 함께 묻혀있다고 하네요.





*인목왕후 김씨(1584~1632)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로 1584년에 태어났으며 1600년 의인왕후 박씨가 사망한후 1602년


19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 ,1606년에 영창대군을 낳게됩니다.


이 당시 광해군은 세자의 지위에 있었으며 실권자인 유영경이 적통론에 입각하여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이 즉위하게 되자 유영경 일파는 몰락하게


되고 대북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후 왕통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해 선조의 첫째 아들인 임해군을 살해하고 이어서 영창대군


을 폐위시킨뒤 마찬가지로 살해하게 됩니다.또한 인목왕후의 아버지인 김제남을 사사,인목왕후를


폐비시킨 후 서궁으로 유폐시기기까지 합니다.





이 후 광해군의 폐륜행위는 정변의 구실을 주어 인조반정을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로인해 광해군은


폐위되고 인목왕후는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어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 최고의 어른 위치에


자리하게 됩니다.이후 1632년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소생으로는 영창대군 외에


정명공주가 있습니다.





*영창대군 (1606~1614)


선조의 14명의 아들중 유일한 적출이며 인목왕후 김씨의 소생입니다.1606년 출생하였으며 이름은


의라고 합니다.앞서 언급하였듯 왕비에게서 태어난 유일한 적출이고 선조가 늦은 나이에 얻은 


까닭으로 부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을 폐하고 세자로 책봉할 생각을 품었다고


합니다.하지만 선조가 급사하여 바램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고 전해지네요.





광해군에 의해 강화도에 유배된 후 조야에서 끊임없이 그를 구원하고자 상소하였으나 안타깝게도


1614년 봄 이이첨 등의 명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합니다.그의 나이 아홉살이


라고 하네요.


이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서 관작이 복구되었다고 합니다.







*임해군(1574~1609)


선조의 서출 장남으로 공빈 김씨의 소생입니다.1574년 출생하였으며 이름은 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성질이 난폭하고 군왕의 기질이 없어 그 당시 선조에게 적자가 없었슴에도 불구하고 책봉되지 못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1592 임진왜란 발생시 근왕병 모집차 함경도로 갔다가 반란군 국경인에게 억류되었다가


왜장 가토에게 넘겨진뒤 몇 차례에 걸쳐 이송되다가 겨우 석방되어 서울로 되돌아왔다고 합니다.





포악한 성격에 포로로 잡힌것에 대한 굴욕감에 사로잡혀 술로 세월을 보내거나 재물을 약탈,상민을 구타하는등


행패를 부렸다고 합니다.대북파의 주청에 의해 유배당한뒤 이듬해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임해군역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복작 신원되었다고 합니다.





14대 선조 가계도 정리


중종과 창빈 안씨의 9남인 덕흥대원군의 3남.1552년 출생 1608년에 사망합니다.재위기간은 1567년 7월부터 


1608년 2월까지 40년 7개월이며 부인은 8명에 자녀는 14남 11녀를 두었다고 합니다.





첫째부인 의인왕후 밖시와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으며 둘째부인 인목왕후 김씨와의 사이에는 영창대군과


정명공주가 있었습니다.셋째부인 공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임해군과 제 15대 왕이였던 광해군을 얻었으며


넷째 부인 인빈 김씨로부터 4남 5녀를 얻는데 의안군,신성군,원종(정원군),의창군,정신옹주,정혜옹주,정숙옹주,


정안옹주,정미옹주입니다.다섯째 부인 순빈 김씨와의 사이에서는 순화군을 얻었으며 , 여섯째부인 정빈 민씨에게서


2남3녀를 두었는데 인성군,인흥군,정인옹주,정선옹주,정근옹주가 있다고 합니다.일곱번째 부인 정빈 홍씨에게


1남1녀 경창군과 정정옹주를 낳고 마지막 여덟번째 부인 온빈 한씨에게 흥안군,경평군,영성군,정화옹주를


얻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해서 선조 가계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