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삼전도 굴욕 역사 돌이켜보기

Posted by BE you
2015. 9. 27. 17:29 역사이야기 History


인조 삼전도 굴욕


삼전도는 조선 시대에 한강 상류에 존재하던 서울과 경기도를 


잇는 나루터였다고 합니다.오늘날 서울 송파구 삼전동 부근에 위치


하였으며 왕이 이웃 헌릉과 선정릉으고 갈 때 이 나루를 이용하였다고


전해지네요 오늘은 인조 삼전도 굴욕 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런 사건


한강 상류 삼전도에서 1637년 1월 30일에 우리나라 역사에서 잊지 못할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우리가 오랑캐라고 멸시해오던 청나라 황제에게 조선 왕 인조가


절을 세 번 하고 머리를 아홉번 조아린 사건입니다.




1637년 1월 30일 묘시 (오전 다섯시 ~ 일곱시)무렵에 인조는 대신들과 호위군을 동반하여 서문을 


빠져나온 뒤 청 태종 지휘본부가 위치해있던 삼전도로 향하게 됩니다.국왕의 의례복도 아닌 남색


융복(戎服) 차림의 초라한 행색이였다고 합니다.이를 지켜봐야했던 수많은 백성과 군사들이 통곡을


하였다고 합니다.





인조가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受降壇) 말그대로 항복을 바치는 단에 나아가게 되고 청태종에게


눈물을 흘리며 세 차례의 큰 절과 아홉 차례 머리를 땅에 박았다는 항례(항복의식)인 '삼배구고두'를


행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될 만큼 치욕적인 사건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 당시 인조는 땅에 엎드린 채 대국에 항거한 죄를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하였고 이에 청 태종은


신하들에게 조선 국왕을 용서한다는 칙서를 내리게 하였다고 합니다.



인조 삼전도 굴욕


조선 15대 왕 광해군 재위 때 여진족 추장인 누루하치가 부족통일을 하고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누루하치 (후금의 태조)는 중원을 통일할 목적으로 명나라를 공격하였으며 명나라는 과거 조선을 위해 파병을


한것을 이유로 지원을 요청합니다.하지만 현명했던 광해군은 명나라의 패를 예상하고 명나라에 파명을 하는


것과 동시에 후금과 싸울 뜻이 없슴을 전해 피 한 방울 흘리지않고 현명하게 외교를 펼칩니다.


하지만 이로인해 광해군은 명나라를 배신하였다는 이유로 신하들에게 쫓겨나게 됩니다.





이 후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명나라와는 친하고 금나라를 배척한다는 '친명배금'정책을 쓰게 되는데 할아버지인


선조가 일본으로부터 유린을 당한지 40년 만의 일이라고 합니다.


인조는 임진란으로 부터 역사의 교훈을 얻지 못한채 오랑케 후금과의 전쟁인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치루게 되는데


가장 치욕적인 참패를 당하게 됩니다.병자호란 때 오랑케인 청나라 황타이지가 삼전도에서 인조에게 항복을 받아내게


된 것입니다.인조 삼전도 굴욕의 역사가 이렇게 해서 삼전도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을 인질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고 청나라의 요구로 비문이 건립되게


됩니다.비문 건립 관련한 최초의 기록들도 1637년 3월부터 등장합니다.


같은해 3월 12일 비변사에 삼전도 비석이 준비되어 있으니 비문을 얻어다가 새기면 된다는 보고가 발견되었고 


3월 20일 인조의 재가가 떨어져 수항단 터에 세우기로 합니다.





지세가 낮고 한강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장마철에 물이 들 것을 대비 지면에서 5-6장 높이의 돌계단을 쌓아 올렸으며


공조가 주관하고 호조와 병조의 후원으로 인부들에게 용가를 지불하고 공사를 착수합니다.


그 해 10월 30일경 공사가 끝마치게 되어 11월1일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을 모두 해산조치하고 정문과 협문 3칸 정도 규모


비각이 완성되어 비문 내용만을 각자하는 일만을 남겨놓게 되었습니다.서울에 체류하던 청나라 사신 마대부등이 삼전도 비가


들어 설 자리를 방문하였고 귀부 및 기단등 규모를 일일히 확인하고 돌아갔다고 전해집니다.





비문을 찬술하는 일만 남겨둔 상황에서 조선은 청에서 문장을 받아 비문을 새기게 되는걸로 예상하였으나 문장을 지으라는


인조의 전교로 인해 비변사에서 비밀리에 적격자를 탐문하게 됩니다.인조는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고 후일을 도모하는


것은 나의 역할이 될테니 오늘은 다만 문자로 저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어 일을 더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 뿐임을


강조하며 간곡히 비문의 찬술을 부탁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이경석은 자신의 명예보다 국가의 안위를 먼저라고 판단하고


고민끝에 비문을 짖게 됩니다.후날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준 형에게 '글을 배운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매우 고통스러워하였으며 제자들에게도 수모와 공격을 받게 됩니다.





청일전쟁 이후 고종 32년에 치욕적인 역사를 잊고자 이 비문을 강물 속에 쓰러뜨렸으나 일제 강점기때 일제가 우리 민족의


항복하였던 역사를 알리게 하기 위해 다시 비문을 세우게 하였다고 합니다.그 이 후 우리 민족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하고나서 이 지역 주민들이 땅속에 파 묻었으나 1963년 홍수로 다시 모습이 드러나게 되자 비를 다시 세워두었다고하네요.


정말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진 삼전도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해서 인조 삼전도 굴욕 에 대한 역사를 알아보았습니다.